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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팔레스타인 난민의 기원


 진화론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창조의 증거들



팔레스타인 난민의 기원













 

아래 글에 덧붙이자면, 현재 팔레스타인 지역은 이스라엘이 아랍 연합군의 공격에 맞서 싸워 얻은 지역이다.


빗대자면, (1)일본이 한국이 건국되자마자 한국 침략 전쟁을 일으켜서 한국이 가까스로 격퇴했는데 일본이

정신 못차리고 다시 전쟁을 준비하자 (2)한국이 선제 공격에 나서 대마도를 점령해 버린 것과 같은 상황인

것이다. 대마도 거주민 입장에선 억울할 수 있겠지만 귀책 사유가 일본에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꾸 대마도 주민이 해방을 요구하면서 남한에서 자살 폭탄 테러를 일으키고 한국의 민간인들을

저격 살해하고, 아이들을 납치하고 급기야 서울-수도권에 1천발씩이나 되는 로켓을 날린다면, 게다가 일본 

본국에서도 한국과의 3차 전쟁 준비에 광분하고 있다면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____________

(1)이 바로 이스라엘이 건국되던 날 발생한  전쟁(1948년)이다.

(2)는 소위 '6일 전쟁'으로 불리는 제3차 중동전쟁(1967년)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간략한 설명)

- 이-팔 분쟁의 배경

- 쉽게 써 본 이스라엘 중동 지역 분쟁의 역사

- 3년 만에 재개된 팔레스타인 평화 협상의 이슈(2013) 

팔레스타인 영토 변화에 대한 진실 

이스라엘과 하마스 묵시록 인사이드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난민의 진실            


 










 


(관련포스팅)                                                                                          


사진과 영상으로 보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태의 진실(극혐 경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이스라엘만의 잘못일까? 

이스라엘-하마스 : 이번 전쟁 다시 보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관련 논쟁의 일반적인 전개 

이스라엘은 과연 악마인가 

하마스, 피난하는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에게 집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명령하다. 

나는 왜 이스라엘을 편드는가 

팔레스타인 난민의 기원 [만화] 

인간 방패가 되지 않기 위해 하마스로부터 도망치는 팔레스타인 민간인들

어린이를 인간 방패로 쓰기 위해 끌고 가는 하마스(영상) 


(관련기사)


하마스, 가자 지구 민간인 학대를 폭로하는 기자들을 위협  

- 네타냐후, "하마스는 '텔레비전에 잘 받는' 팔레스타인 희생자를 원한다.

팔레스타인 하마스 대원, "이스라엘의 신이 우리가 쏜 로켓의 방향을 바꿔버린다" 불평 


(참고자료)


이스라엘(KCM) 

이슬람의 이해(KCM) : 형성과정, 교리, 기독교와의 차이점 등 

이스라엘은 왜 가혹하게 대응하는가? (내가 조갑제를 인용해야 한다니... ㅠㅠ)

(관련 동영상)


이스라엘 지역으로 무차별적으로 발사되는 하마스의 로켓을 아이언돔이 격추하는 장면   







[이하 퍼온글이나 { }은 본인이 추가한 부분임.]


[팔레스타인 난민의 기원]

팔레스타인 난민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일까요?

대부분의 대중매체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을 빼앗았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난민이 생긴 것이라고 보도를 합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대중적인 인식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지 않습니다. 팔레스타인 난민은 아랍이 주도한 이스라엘과의 전쟁의 결과로 발생했으며 아랍 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 난민을 정치적 담보로 이용함으로써 반이스라엘 여론을 조장해 왔습니다.


{팔레스타인 거주민은 자발적으로 떠났다. 이스라엘이 쫓아낸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1948년 5월14일에 건국하자 하루가 못되어 아랍 6개국 동맹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전서부터도 아랍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국가와 유태인 국가로 분할하자는 제안을 거부하면서 이스라엘 거주지에 폭력과 테러를 일으켜 왔습니다. 지속되는 아랍군의 폭력과 테러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의 방어군인 하가나(Hagana)의 힘이 점점 강해지자 두려움의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서 많은 아랍인들이 자기가 살던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아랍군 지도자들은 가까운 미래에 계획하고 있는 전쟁과 아랍 주민들이 이스라엘에 항복할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아랍 주민들에게 그 마을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한 예로 1948년 하이파(Haifa)와 자파(Jaffa)에서 아랍군의 공격에 대해 이스라엘의 하가나군이 승리를 거두자 아랍 지도자들은 아랍 주민들이 이스라엘에 항복하지말고 명예롭게(?) 마을을 철수 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유태인 도시에서 소수민족으로 사느니 후에 이스라엘을 박멸하고 다수민족으로서 그 도시를 탈환할 것을 고무하면서 말입니다. 반면 유태인이었던 하이파의 시장은 아랍인들이 계속 거주하기를 간청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아랍 주민들을 위협하거나 추방할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물론 폭력과 테러리스트들을 돕는 온상지로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던 몇몇 마을의 아랍주민들에게 철수를 명령한 적은 있었으나 의도적으로 아랍 인구를 감소시키거나 추방할 어떤 계획도 세운적이 없으며 행동도 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실제로 아랍국가가 지원하는 한 연구단체의 보고서에 의하면 팔레스타인의 아랍 난민들의 대다수는 자발적으로 떠났으며 68%가 이스라엘 군인을 본적도 없이 떠났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하가나의 성공적인 방어적 군사활동으로 지레 겁을 먹은 아랍인들이 도망을 갈 수 있었던 이유도 아랍군들과는 달리 이스라엘군이 도망갈 자유를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에 남아 살고자 하는 아랍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아랍인들이 유태인 거주지를 공격했던 목적은 유태인들을 모조리 쓸어내는 것이었으며 의도적으로 민간인을 직접 공격하는 것은 다반사였습니다. 이러한 대조적인 행태는 이스라엘 독립 전쟁으로 요르단이 유대와 사마리아 땅 (웨스트 벵크라고 불리우는 지역)을 차지하였을 때와 이스라엘이 1967년 6일 전쟁에서 그 지역을 도로 차지했을때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1948년 요르단이 웨스트 뱅크 지역을 차지했을 때 아랍은 거주하던 유태인들은 강제로 쫒아내고 그들의 회당과 부동산을 전부 파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 지역을 도로 차지했을 때 아랍인들을 계속 거주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물론 이슬람교 회당에서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였습니다.


{아랍 국가들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돕지 않는다.}

아랍 난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살던 아랍 국가과 도시를 떠나야 했던 70만명의 유태인 난민도 존재했었습니다. 이스라엘 독립전쟁이 발발했을 때 아랍국가에 살던 유태인들에 대한 폭력과 박해가 극심해졌기 때문입니다. 소위 ?시오니즘에 대한 보복?차원으로 아랍국가에 살던 유태인들은 박해를 당하며 재산을 몰수당했기 때문에 그들은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로 망명을 하였습니다. 아랍국가에서 망명 온 유태인 난민은 이스라엘을 떠난 아랍인보다 조금 더 많았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러한 유태인 망명자들이 이스라엘로 도망 와서 정착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랍 국가들은 같은 언어와 종교와 문화를 공유한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도와 자기네 나라에 와서 정착하도록 전혀 돕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난민들을 형편없는 수용소와 게토에 살게 하면서 이스라엘을 제거하여 영광스럽게 귀환할 것을 주입시켰습니다. 1948년에서 1967년 사이 요르단이 웨스트 뱅크를 지배하고 이집트가 가자지구를 통치할 때에도 팔레스타인 난민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아랍국가들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도울 의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 난민이 존재하는 한 많은 세계 열방들이 휴머니즘적 차원에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럼으로써 그들을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주장과 선전에 이용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 원주민은 얼마 되지 않는다.}

실제로 팔레스타인 난민에 관한 대중매체의 이미지는 마치 그들이 그 땅에 수천년 동안 조상 대대로 살다가 이스라엘에 의해 쫒겨난 것처럼 믿게끔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유엔의 공식적인 팔레스타인 난민의 정의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난민은 ?1946년에서 1948년 2년 동안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이라는 예외적인 조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난민 중에는 팔레스타인에 산지 얼마 안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2년 동안 거주?라는 예외적인 조항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단순히 이주한 사람도 난민이라고 불린다.}

또한 팔레스타인 난민정의에는 이유와 상관없이 팔레스타인 내의 한 지역에서 또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난민에 대한 일반적 정의는 박해에 대한 두려움의 근거가 분명히 존재해야 하며 그 나라에서 박해를 피할 길이 없어서 다른 나라로 떠나야만 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정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이례적인 난민의 정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유엔은 일반적인 망명자들을 다루는 기관과는 별도로 팔레스타인 난민들 다루는 기구를 따로 두고 지난 수십년 동안 엄청난 비용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난민문제는 계속 악화되어 왔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팔레스타인 난민은 이스라엘이 아랍인들의 수천년 살던 고향땅을 빼앗고 그들을 쫓아내서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아랍이 팔레스타인의 두 국가 분할안을 거부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4백만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아랍지도자들과 테러리스트들은 악한 선전에 난민들을 이용하고 있으며 동족의 난민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파괴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은 언론이나 대중매체가 전하는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에 대한 보도를 그대로 받아들여 속기보다는 진실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이스라엘을 비방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계적인 비난을 부당하게 받고 있는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 ” (시편 5:11-12)

/출처: 사랑의 메세지










[펌] http://cafe.daum.net/aspire7/EcBo/1114

한국인들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오해

한국인들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문제에 관하여 엄청난 오해를 갖고 있습니다!

한국의 비기독교인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도  문제에 관하여 많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요 자신도 캐나다에 오기전까지는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팔레스타인의 장애인 몇명이 죽었다는 기사에 수많은 사람들이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그토록 학살한 이유를 알겠다이스라엘에 핵폭탄을 투하해야 한다등의 댓글들로 가득채우고 있습니다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반유대인 혐오증상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하여 크게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며, 또한 일반인들 뿐만 아니라 언론매체들도 대부분 진실을 모르는 기자들로 가득하여 있어서 진실을 알려주지 않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으로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에 팔레스타인인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데 2천년동안의 유랑생활을 마치고 갑자기 돌아와서 성경책 한권들을 들이밀며  땅이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곳에 거주하던원주민인 팔레스타인인들을 쫓아내어 오늘날 팔레스타인인들이 가자지구와 요단강 서안지구에 쫓겨나서 살고 있으며 그들이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을 계속하여 축출하려고 무자비하게 공격하고있다고 오해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진실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1)            1876이스라엘 땅에 유대인들이 귀환하기 시작하기까지  땅은 황무지로 있었습니다!

-          이스라엘 전역의 인구는 3만명에 불과하였으며그중 1만여  명이 유대인이고 1만명 정도가 기독교인 순례객들이었으며 아랍인들은 수천명 정도로 그들은 기독교인 순례객들의 짐꾼심부름꾼으로 일하였습니다

-          1799 나폴레옹이 상륙하여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으나 이스라엘 해변가의 전체 인구는 1천명에 불과하고 황량한 황무지에 불과하였으므로 포기하였습니다.

-          1867 헉클베리 핀의 모험의 저자 마크 투웨인은 팔레스타인 땅을 기행하고서 전역에 텐트 몇채외에 건물이 전혀 없음과 갈릴리 호수에  한척 없음을 보고  적막함을 한탄하였습니다.

-          1838 예루살렘에 설치된 영국 영사관은 1839 인구 조사에서 예루살렘에만 인구15 정도가 거주하고 이스라엘 전역이 황무지임을 보고하였습니다.

-          1840년대에 이집트의 징병제와 1858 수에즈 운하 건설이 진행되고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중에 12만명이 죽는 대역사를 피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팔레스타인 땅으로 도피한 적이 있으나 그들은 그곳에서 살수 없음을 알고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러므로 1876 유대인들의 귀환운동이 시작되던 1 알리야  이전에는 이스라엘 땅은황무지로 있었던 것입니다.

-          아모스 9 에서 예언된   땅이 이스라엘이 귀환하기까지 오랫동안 황무지로 있으리라는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2)            오늘날 팔레스타인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인들보다 늦게 주변국가 이집트와 요르단 시리아등지로부터 몰려들어오기 시작한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인 사람들입니다.

-          이들은 유대인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혹시 먹을 것이 없을까하여 몰려들어왔습니다.

-          하이파-예루살렘간의 철도건설은 더욱 많은 아랍인들이 몰려들게 하였습니다.

 

(3)            아랍인들은 오스만 터키 왕국에 유대인 입국을 금지시켜줄것을청원.

-          아랍인들은 당시 이스라엘 땅을 지배 통치하던 오스만 터키 왕국 정부에 유대인들이  이상 유입되지 못하도록 막아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           요청이 받아들여져서 1900년경부터는 유대인들은 들어오지 못하고 아랍인들은 무제한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          1876년부터 1900년까지 이스라엘 땅에 유대인들이 많았었지만 1900 이후부터는 거주민구성분포가 역전되기 시작하여 아랍인들이 유대인들보다 많아진 것입니다.

(4)            1차대전에서 오스만터키의 패배로 영국위임통치

오스만터키가 1 세계대전에서 패배함에 따라 팔레스타인 땅은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기로1922 산레모 회의에서 결정되었습니다.

 

(5)            영국 정부 또한 유대인의 유입을 제한하였습니다.

-          영국정부는 아랍국가들과 아랍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땅으로의유입을 연간 5천명으로 제한하였습니다.

-          반면에 아랍인들은 이스라엘 땅에 무제한으로 들어올  있었습니다.

 상황은 1948 5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          2차대전 동안 아랍인들은 독일을 지지하였으며 유대인들은 영국을 지원하였습니다.

(6)            2차대전후 많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귀환.

-          그들은 영국 해군들에 의해 저지당하였고 저지당한 선박들중의 하나가 바로 엑소더스영광에의 탈출 배였습니다.

-         유대인들은 먼저 들어와 있던 아랍인들로부터 땅을 사들였습니다.

-         2차대전후 이스라엘 독립당시까지 많은 유대인들이 유입되어 이스라엘 땅에는 유대인과아랍인이 거의 동등한 수를 구성하게되었습니다.

(7)            1948 5 14 이스라엘 독립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하자 주변 아랍국가들은 일제히 전쟁을 선포하고 이스라엘을 완전멸종시키겠다고 호언 장담하였습니다전투 장비와 화력면에서 아랍국가 전체는 신생 이스라엘의 100배가 넘는 장비와 군대와 화력을 갖고 있었습니다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 땅에거주하는 아랍인들로 하여금 잠시 동안만 피해있거나 주변국가로 피난 가있으라고 하며 아주 쉽게 이스라엘을 멸종시킬 것이므로 잠시만 피난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아랍인들이 이스라엘 땅을 떠났으며 일부는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피난민촌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러나 1 중동전쟁  이스라엘 독립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습니다이스라엘인들의 투철한 결사항전 정신이 승리를 이끌었습니다이스라엘은 어느 나라의 도움도 받지않은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결과 피난갔던 아랍인들은  이상 자기네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가자지구와 요단강서안지구에 피난민 생활을 계속하게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이 그들을 쫓아낸 것이 아닙니다.

(8)            2,3,4,  중동전쟁

 

아랍국가들의 이스라엘 죽이기 작전은 계속되었습니다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을 쉽게 이길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이스라엘을 목조르겠다고 호언장담하며 수웨즈 운하전쟁( 1956) 6일전쟁(1967) 욤키푸르 전쟁 (1973) 등을 일으켰지만 번번히 참패로 끝났습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공격하여 일으킨 전쟁들이 아니었습니다아랍국가들이 전쟁을 발발시킨다음  전쟁에서 번번히 패퇴한 것입니다.

 

(9)            2008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

2008 12 까지 가자지구의 하마스는 이스라엘 영내로 3500 발에 달하는 로켓포를 쏘았으며 그것들 중에는  구리온 공항과 네게브의 핵시설에도 도달할  있는 위협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그들의 생존을 위해 가자지구를 침공하고 그들의 무력도발 설비들을 무력화시킨 것입니다.

 그때에도 팔레스타인인들이 먼저 도발을 계속하므로 참다 참다 못하여  이상 무력도발을 못하도록 무력화시키기 위해 침공한 것입니다.

 

(10)      오늘날의 이스라엘의 가자침공

금년들어서만 가자지구의 하마스는 수백발의 로켓포를 쏘아 이스라엘 주민들의 가옥을 전파시키거나 수십명을 부상케하였습니다그들은 이스라엘의 군사시설만을 목표로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수많은 민간인들을 무차별 살상하는 것이 일상의 습관입니다그러한그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민간인을 살상하였다거나 장애인을 살상했다고 항의할 자격이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군사시설과 무장단체들을 목표로 공격해왔습니다그러나 전쟁에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 전쟁이 인류역사상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어린이들을 테러에 동원하는 것은 하마스의 주요 전술이며 특징입니다. 그러한 그들이 어린이를 살해한다고 항의할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11)      시리아 사태와 이라크와 가자지구

-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공습하여 민간인 몇명이 죽고 장애인이 한명죽고 여러명이 부상당했다고 난리입니다.

-          그런데 그것은 가자지구의 하마스가 먼저 공격하여 그에 대한 보복과 응징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전에도로켓포 공격외에도 최근의 3명의 소년들을 납치하여 살해한 사건외에도 일가족 살해사건이 금년에만도 여러건 있었습니다이스라엘은 가만두면 먼저 공격하지 않습니다그러나 그들이 공격당하면 반드시 보복합니다국가는 개인과 다르며 하나님의 사법정의로서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          이스라엘이 가자를 공습하여 160명의 인명피해가 났다고언론들이 난리입니다.

-          그러나 시리아에서는 아랍인 무슬림끼리 몇만명을 죽이고 있습니까? 거의 30만에 육박합니다. 이라크 또한 몇만명을 넘어  수십만의 살육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잔학함은 기억하고 비난하지 않습니까?

-          아랍인들에 의한 아랍인 살육에 비하면 1000분의1 안됩니다.

-          그나마도 그들이먼저 인명을 살상하여 전쟁 도발을 일으킨 책임이 있습니다.

-          그들이 먼저 살육한 행위들에 대하여는 당연히 책임을 져야합니다.

-           

(12)      히틀러와 이스라엘

히틀러와 나치스는 유대인들이 저항하지도독일인들을 공격하지도 않았는데 유대인들을잡아다가 살육하였습니다 수는 600만에 달한다는 것이 공인된 추산입니다.

반면에 하마스의 아랍인들은 가만히 있는 이스라엘인들을 무력으로,  로켓포로 공격하였습니다그러므로 그들에게 무력으로 응징하는 것은 당연한 국방이며 또한 생존에 필요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숫자면에서도 이스라엘인들에 의한 민간인 살상 숫자가 겨우 160명에 불과합니다. 600만이 살육당한 홀로코스트에 비할  있습니까?

인류가 유대인들에게 끼친 살육과 해악들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1060년경의 프랑스 노르망디에서의 50 살육십자군 원정시의 유대인 살육, 1500년대의스페인에서의 유대인 살육, 1700-1800년간의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에서의 200 살육  수많은 유대인들이 살육을 당해왔습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그들에게 주신 땅에서 평안히 안식하며 하나님의 독생자예슈아 하마시아를 깨닫고 믿을 때가 되었습니다.

(13)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문제의 근본적 해결

 

중동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이스라엘 땅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이 그들의 조국을 찾아서 돌아가야 합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원래가 이집트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른 일부는 시리아 혹은 요르단에서 왔으며 그들이자기들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그들이 이스라엘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받을 수는 없습니다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수없이 약속하고 주셨던 땅이며  땅에 관한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가 아닌가 달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영토는 2 평방 킬로미터에 불과합니다이집트의 면적은 100 평방킬로미터로 이스라엘의 50배에 달합니다그들의 땅에서 가자지구의 하마스와 서안지구의 알파타 사람들을 수용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나일강 하류에서부터 유프라테스강까지레바논까지요르단 서부지역까지를 주셨습니다.( 15)

인간들은 탐욕에 의해서 살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하나님의 해법이 무엇인지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해법을 찾지 못할 뿐입니다.

이러한 궁극적 해결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까지는 실현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14)      팔레스타인 왕국문화경제,

수많은 사람들세계의 인류 대부분은 마치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오랫동안 나라와 민족을이루고 살고 있었던 것으로 착각 오해하고 있습니다그러나 그런 나라는 실제로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그런 까닭에 팔레스타인의 땅을 어디서든 100미터 이상을 파도, 어떠한 팔레스타인 유물도 발견되지 않고 오직 이스라엘의 유적들과 유물들만 발굴됩니다. 왜요? 팔레스타인 왕국이란 실제로 역사상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지금부터 3천년 이전의 카나안 왕국의 유물들이 있을 뿐이며 그들은 오늘날의 팔레스타인인들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1500년경 오스만 터키가 이스라엘 땅을 점령한 이후로  땅은 오랜동안 가뭄과 기근으로 사람이 살수없는 황무지로 보전되었으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통하여 예언하신바를 성취하신 것이었습니다또한 터키 정부는  지역에서 끊임없는 반란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지역을 고엽화 하여 황무지로 버려두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는 팔레스타인 문화나경제나왕국이나팔레스타인 언어나팔레스타인 민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그들은 그저 주변국가에서 살다가 이스라엘인들이 몰려오는 것을보고 따라 들어왔고 그들은 무제한으로 들어왔고 이스라엘인들의 유입은 제한되었기에 인구 역전이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팔레스타인국가나 민족이란 허구라고 말할  있습니다.

경기도 안산에 파키스탄인들과 방글라데시인들이 오랫동안 몰려 살면 그곳이 파키스탄 땅이 됩니까?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 땅의 원주민이 아니라 안산시내 불법체류자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서울을 향하여 로켓포를 무차별 수백발 발사하였다면 당신은 국가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겠습니까?

 

(15)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천년왕국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는 날 수많은 이방민족들이 엄청난 인명피해를 당할 것입니다.  주께서는 그날에 수많은 이방인들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그후에 생존 이방민족들이 이스라엘로 매년 초막절을 지키러 올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즈카랴 14 16-)

그날에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생존해 있겠습니까?
요단강 서안에도 팔레스타인인들이 생존하여 있겠습니까?

그들이 알라 악빨하고 있겠습니까?  그들이 메카를 향하여 절하고있겠습니까?

뿐만아니라 이스라엘인들의 그들의 땅에 대한 영유권을 반대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스라엘 땅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그들에게는 다른 땅이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땅에 이스라엘인들만 살도록 하시고 그분께서 그 왕국의 국왕으로 취임하신다면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 반항하시겠습니까?

 

당신은 중동문제에 관하여 하나님보다 더 정의로운 판단을 갖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천국에 가지 마시고 당신의 천국을 세워 나가십시오!

 

2014. 7. 14 하토브

 

 

다음은 과거에 올렸던 이스라엘 땅이 황무지로 보전되었다는 예언과 팔레스타인인들이 원주민이 아니라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이라는 것에 관한 글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 땅을 황무지로 보전하셨는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스라엘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귀환하기 전에 팔레스타인인들이 다수 살고 있었으며 그런 바탕위에서 이스라엘인들이 2천년만에 돌아와서 기존에 살고있던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갑자가 나가라고 쫓아내어 그들이 쫓겨나서 오늘날 가자지구에 하마스가요단강 서안지구에 알파타가 피난민들로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 혹은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이스라엘인들이 1882년부터 본격적으로 그들의 이스라엘 땅에 귀환하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땅에 거주자가 희박하였으며 땅이 사실상 황무지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러 역사 자료들간에는 상당한 차이들이 있습니다만 다음의 많은 자료들과 증언들은 적어도1830년까지는 이스라엘 땅이 황무지로서, 북아메리카의 인디언 거주자들의 인구밀도보다 희박한정도의 무인지경에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증거들에 의해서 확인됩니다.

 

(1)                1830  이전의 이스라엘 

 

1590 경의 여행가 거너 에드워드 웹에 의하면 이스라엘 땅은 낡은 벽과 잡초들만 있고 사람이없었다고 합니다.

Gunner Edward Webbe, Palestine Exploration Fund, Quarterly Statement, p. 86, cited in de Haas, History, p. 338.

 

1767년대의 영국 고고학자 토마스 쇼도 기름진 땅을 경작할 사람이 없다고 증언했습니다.

 

1780-85년대의 프랑스 여행가 콘스탄틴 프랑쏘아 볼르니 백작 :

   폐허화되고 황폐하게  땅이다광역 시리아는 팔레스타인을 포함하는데 농부가 거의 전무하다.예루살렘 인구는 12,000-14,000 명으로 보았으며 베들레헴은 600 정도인데 헤브론은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로서 800-900 명을 무장할  있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1799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경유하여 얍바 (오늘날의 이스라엘 주요항구인 하이파 상륙하여 땅에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해안에 인구가 1천명 정도로서 도저히 국가를 세울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1817-18 여행가James Mangles and the Honorable C.L. Irby

 

갈릴리 호수에 배한척 없다고 하였습니다.

 

After a visit in 1817-1818, travelers reported that there was not "a single boat of any description on the lake [Tiberias]."

 

**James Mangles and the Honorable C.L. Irby, Travels in Egypt and Nubia (London, 1823), p. 295.

 

1827 독일 백과사전 : 팔레스타인은 황폐하고 아랍 무장강도들이 출몰할 뿐이다고 기술하였습니다.

 

 

(2)                1830-1882 연간의 이스라엘 

 

-       1829년부터 이집트는 남자는 의무적으로 군복무해야하는 징병제를 실행합니다.

-       터키는 이집트에 1831년부터 1841년까지 이스라엘 땅을 통치할수 있도록 위임해줍니다.

-       이집트내의 수많은 사람들이 징병제를 피하기 위해 이스라엘 땅으로 이주해옵니다.(1831-41)

-       이에 이집트 정부는 관원들을 파송하여 이스라엘 (팔레스타인내의 이집트인들을 다시붙잡아갑니다.

-       그러나 소수는 팔레스타인 땅에 남아서 잔류하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       1841년부터 터키는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땅(팔레스타인) 회수합니다.

-       1838 영국은 기독교인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영사관을 설치합니다.

-      1839 영국 영사관은 인구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이스라엘 땅은 황폐하게 되었으며예루살렘은 인구가  15천명 이하인데 그중 절반 이상이 유대인들이라고 보고합니다나머지 절반이하는 그것의 절반이 기독교인 순례자들이며  나머지가 아랍 무슬림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       1863년의 인구조사를 발표한 1864 상업보고서는 예루살렘지역 전체 인구 15,000 명중8천명이 유대인이었고 45백명이 무슬림이었으며 나머지 2천여명이 여러 기독교 교파들이었다고 보고합니다.

-        

-       1867 톰소여의 모험 헉클베리 핀으로 유명한 마크 투웨인은 남북전쟁이 끝난후 이스라엘땅을 방문하였는데 <  땅이 극히 황무하였고, 30마일(48킬로미터이쪽 저쪽으로 가도 집한채 없는 황량한 곳이며오직 2-3개의 베두윈 텐트모음이 있을 뿐이었고 항구적 거주 시설은 없었고10마일을 달려도 10명의 인간을 볼수 없었다.  갈릴리 호수에는  한척 떠있지 않았다>   보고하고 있습니다그는 나사렛가버나움예루살렘벳새다갈릴리 호수를 방문하였는데  모든 지역이 황량한 폐허로 남아있음을 보고한 기록을 순진한 외국 (Innocent Abroad) 이라는 책으로 발간하였고 지금도 출판되어 판매되고 있습니다.

 

-      1858-71 : 스웨즈 운하 건설

 시기에 이스라엘 땅에 어느 정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1858년부터 1871 사이에 스웨즈 운하가 건설되기 시작한 것입니다그때 동원된 인원이 150만명이었으며 건설 공사중 죽은 사람들이 12만명을 넘었습니다이들은 적절한 보상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이것을 피하기 위해 수만명의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  광야로 피난 나옵니다나중에 돌아가지만 소수가 이스라엘 땅에 남은 것으로 보입니다.

스웨즈 운하는 프랑스인 레셉스가 시공하였는데 원래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영토로 주신영역 안에 있습니다.(  15 후반)

 

 

(3)  1882-1900 이스라엘 

-       1883 C.R. Conder 대령에 의하면 그땅이 황무하며 아랍인들은 오히려 인구가 줄고 있다고 보고합니다그는 1872년도에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헷과 모압 1883)

 

-       작가 삐에르 로티는 프랑스의 유명작가로서 1895년도에 그의 기행문을 썼는데 갈릴리를 봄에 방문하여 보고 그곳이 조용했다고 보고하면서 길보아산 근처에 관해팔레스타인의 다른 모든지역처럼 도시와 왕궁들이 먼지로 변해있다 하고 방치와 포기의 우울함이  거룩한 땅을 누르고 있다고 썼습니다.

                ("Palestine Before the Zionists," Commentary, February 1976, pp. 48-49.)

              http://www.eretzyisroel.org/~peters/depopulated.html#36

 

 

-       1880년까지 미국의 예루살렘 영사관은  지역이 역사적으로 인구와 부가 줄어들거나 지난40 동안 증가하지 않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As late as 1880, the American consul in Jerusalem reported the area was

        continuing its historic decline. "The population and wealth of palestine

           has not increased during the last forty years," he said.

            http://www.freerepublic.com/focus/fr/604628/posts

 

-       1882년부터 유대인 유입이 본격화 됩니다.

그것은 1880 유대인들에 관대했던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2세가 암살되고 알렉산더 3세가 즉위하자 마자 유대인 살육인 포그롬(Pogrom) 시작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탈출과 시온으로의 귀환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시온의정서는 이러한 배경에서 러시아인들에 의해 제조 조작된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에 따라 유대인들에 의한 공산주의 운동도 가속화되었습니다그것은 제정 러시아에 대한저항운동이었습니다.

1882년의 유대인 귀환운동을 1 알리야라 하며 이때 4만명이 이스라엘 땅으로 유입되었습니다.

-       1897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1 시온주의 총회는 이스라엘 땅에 이스라엘인들의 국가건설을 실현할 것을 결의하였고 시온주의 운동을 촉구하였습니다이때 참석자는 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됩니다.

-       이에 따라 이스라엘 땅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은 위협을 느끼며 1900 무렵에 터키 정부에유대인들의 유입을 막아줄 것을 요청합니다.

 

(4)  1900-1918 터키의 유대인 억압, 아랍인 자유 유입

 

이스라엘내의 아랍인들의 청원에 의해 오스만 터키 정부는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유입을 적극 저지하고 금지하였습니다이러한 유대인 진입 금지령은 1917 1211 영국군 알렌비 장군에 의한 예루살렘 입성과  이후 1918 터키의 일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땅에는 무수한 아랍인들이 무제한 유입되었는데 그들은 대체로 유대인들의 유입으로 인한 생활 수준의 향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고 터키 정부가 하이파와 예루살렘 사이의 철도를건설함에 따라 더욱 많이 유입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아랍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우세한 숫자로 거주하였습니다그러나 터키 정부의 억압에도불구하고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유입은 계속되었으며  기간동안 2 알리야로 추가로 4만명 가량의 러시아 유대인들이 유입되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러시아와 유럽으로부터 유입되는데 반하여 아랍인들은 인근 이집트와 시리아와 요르단 등지에서 유입되었으므로 빠른 시일내에 들어올  있었습니다.

 

(5) 1918-1945 영국의 유대인 유입 제한,

                               아랍인 무제한 허용

영국 정부는 처음에는 유대인 유입을 관망하다가 차츰 아랍인들의

소요와 저항이 벌어지고 1차대전중 아랍인 토후들에게 약속했던 맥마흔 선언이 드러나면서 유대인들의 유입을 제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영국 정부는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유대인의 연간 유입 쿼타를 5천명(혹은 1 5천명)으로 제한합니다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 땅에 무제한으로 들어올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유입은 계속되었고그들은 먼저 들어와서 유목 생활하던 아랍인들로부터 땅을 사들였습니다 기간중에 아랍인들은 여러 차례 소요사태를 일으켰으며 유대인들은자체적으로 민병대를 조직하여 스스로를 지키기 시작하였는데  민병대가 바로 팔마크였으며 그것은 나중에 이스라엘 국군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영국이 이스라엘인들의 귀환을 도와준 것으로 오해하고 있으나 실제는 유대인들의유입을 적극 방해하고 막아왔습니다.

2차대전이 발발할 때까지의 수상이었던 네빌 쳄벌린은 반유대인 혐오주의자로 분류됩니다. 2차대전중 유대인들은 영국과 연합군을 도왔으며 아랍국가들은 독일 편에 있었습니다.

 

 

(6) 1945-48 이스라엘의 독립까지

유대인들의 대학살을 피해 생존한 생존 유대인들이 본격적으로 귀환하던 시기였습니다.

영화 영광에의 탈출의 배경이 되었던 엑소더스호의 사건도  무렵 발생하였는데 이때에도 영국은팔레스타인 땅을 지배하면서 유대인들의 유입을 막고 있었습니다반대로 아랍인들은 아무런 제한없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영국은 1948 5 철수를 결정하였고 철수 다음날 5 14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독립 선언과 동시에 아랍국가들은 곧바로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하였습니다.그들은 수십배 혹은 수백배의 군사력으로 이스라엘을 순식간에 이길 것으로 확신하였으며 이스라엘 내에 거주하는 아랍인들로 하여금 잠시 떠나 있도록 하였습니다이에 수많은 아랍인들은 1/3가량이 이집트  주변국가로 피신하였고 나머지는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로 피하였습니다그러나전쟁은 인간들의 예상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가자지구와 요단강 서안지구에 피난하여 있던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하게  것입니다.

 

(7)  어떻게팔레스타인 땅이 황무하였는가?

 

1)    우선 기후학적으로 연구한 자료에 의하면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16-19 세기 동안 강수량이 극히 적었다고 합니다이것은 경작을 사실상 어렵게 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은 그분이 예언케하신대로 그땅을 황무지로 유지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2)    터키 정부는  지역  팔레스타인 지역이 반란이 자주 발생하고 분쟁이 끊이지 않는 지역이라 생각하고  지역을 고엽화시키는 정책을 취합니다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도록 황폐화시키는정책을 취하였던 것입니다.

3)    십자군 원정에서 경험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 땅에 인구가 많아져서 번성하여지면 오히려 외세를 유인하게 되어 터키 자체가 위협받을  있다고 판단한 듯합니다.

이러한 정책을 오스만 터키의 고엽화 정책 Defoliation (혹은Disfoliation) Policy라고 부릅니다.

 

(8)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인구 증가 

 이슬람 민족주의자였던 쉐리프 후세인에 의하면 아랍인들은 과거에는 유목민들로서 유랑하였고그땅을 떠났었는데 유대인들의 유입으로 그땅이 소생케되자 초기에는 유대인들의 유입을 긍정적으로 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1 세계대전과 2 세계대전 사이에 유대인들은 47만이 증가하였는데 아랍인들은 58 8천이 증가하였습니다아랍인 영주자들은 1922년부터 1947 사이에 120% 증가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이 돌아오기 전에는 황무지로서 아랍인들도 살기 어려우니까 그들은 왔다가도 떠나버리곤 하였는데 유대인들이 정착하자 아랍인들도 덩달아 많이 유입되고 떠나지도 않고 인구가 증가하였다는 것입니다그리하여 이스라엘의 독립 당시에는  지역 인구가 아랍인과 유대인이 동수를 이루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Even a leading arab nationalist believed the return of the Jews to their homeland would help resuscitate the country. According to sherif Hussein, the guardian of the islamic holy places in arabia:

The resources of the country are still virgin soil and will be developed by the Jewish immigrants.

 

As Hussein foresaw, the regeneration of Israel, and the growth of its population, came only after Jews returned in massive numbers. The Jewish population increased by 470,000 between World War I and World War II while the non-Jewish population rose by 588,000. In fact, the permanent arab population increased 120 percent between 1922 and 1947

 

http://www.freerepublic.com/focus/fr/604628/posts

 

(9)  팔레스타인 문화역사국가민족

역사상 지난 2천년 동안 팔레스타인 국가나 민족이나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팔레스타인 국가가 있어서 그들의 언어가 따로 있었고, 국가나 정부가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 이후 이스라엘 땅은 유대전쟁으로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135AD 에는 바코바의 난이일어나서 유대인들이 다수 죽고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그뒤로도유대인들이 다수를 이루며  지역에 살고 있었으나 640년경 마호메트의 이슬람 국가인 사라센의침략으로 무슬림 아랍인들이 몰려왔으며이후 십자군 원정군이 침략했을 때에도 유대인들이 여전히 다수 살고 있었으나 전체 인구는 수십만을 넘지 않은 것으로서 희소한 인구를 갖고 있었습니다.이후 몽고의 침입과( 1244-1260, 1299-1303) 오스만 터키의 지배하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은 황무지로 유지되었습니다.

 어떤 시기에도 팔레스타인 국가나 민족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거주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은 팔레스타인 민족이 아니라 인근 아랍국가에서 들어온 불법 체류자들입니다!

 

고대에 다윗과 사울왕 시대에 존재했던 팔레스타인 인들은 카나안인들이 아니라 에게해 지역에서 침입자였으며 그들은 오늘날의 팔레스타인인들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건국과 오랫동안의 지배로 멸종되었습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땅을 파면 오직 이스라엘 인들의 유물이나  이전 카나안인들의 유물이 발굴  뿐이며 팔레스타인 국가나 문화 유물은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팔레스타인인들의동전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0)            성경의 예언

 

아모스 9:14    

내가  백성 이스라엘의 사로잡힌 것을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이 황폐해진 성읍들을 건축하여 그것들에 거주하며 포도원들을 가꾸고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것들의  열매를 먹으리라 
15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예호와의 말씀이니라.

 

  에스겔 36 

34  황폐하던 땅이 경작될 것이니, 거기는 전에 지나가는 모든 자들의 보기에 황폐하였던 곳이라. 
35 
그들이 말하기를  땅이 황폐하더니 이제는 에덴 동산 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폐허된성읍들이 울타리쳐지고, 주민이 거하게 되었도다
.
36 
너희 주변에 남은 열방사람들이  예호와가 폐허화된 곳을 건축하며 황폐한 자리에 심은 줄을알리라  예호와가 말하였고 내가 그것을 이루리라

 

17. 에스겔 37

 

 12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 대하여 예언하여 말하기를 “ 예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백성아내가 너희 무덤들을 열고 너희를 너희 무덤들로부터 올라오게  것이며 너희를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리라

 

14절그리고 내가  영을 너희 속에  것이며너희가 살겠고내가 너희를 너희 땅위에 안식하게 것이며그때에 너희는  예호와가 말하였고 그것을 행하였음을 알리라예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24...그들이  정의심판 가운데 행할 것이며 나의 율례들을 지킬 것이며 그들이 그것들을 행하리라.

 

성경 말씀대로 이스라엘땅은 이스라엘인들이 귀환하기까지 천년 이상 황무지로 유지되었습니다.

이제  이상 팔레스타인 땅에 팔레스타인인들이 오랫동안 살고 있었는데

이스라엘인들이 돌아와서 살고 있던 사람들을 쫓아내었다는 말에 속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오랫동안 살고 있었는데 이스라엘인들이 쳐들어와서 탈취하였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지 않았다고 믿는 것이며 하나님의 예언은 실패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 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어 가고 있다고 믿으십니까?

2013, 3. 21 하토브

 

( : 여기에 인용되어진 많은 문헌들에 관하여는 영문으로 올려진  How God preserved the Land 에서 올려놓았기 때문에그리고  다음의 사이트가 허용하는 바이트가  글당 1 메가 바이트에 불과하여 부득이 생략하였습니다.)